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문단 편집) === 네덜란드 전쟁과 최후 === 1672년 4월, 루이 14세는 자신의 계획을 훼방놓은 네덜란드에게 보복하기 위해 잉글랜드, 스웨덴과 동맹을 체결한 뒤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고 12만 대군을 네덜란드로 파견했다. 튀렌은 루이 2세와 함께 군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샤를루아와 스당에서 출발해 친 프랑스 성향의 중립 지역인 리에주 주교령을 지나 마스트리흐트 근처에서 합류했다. 1572년 5월 5일 루이 14세가 샤를루아에 도착한 뒤, 튀렌은 5월11일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비세로 진군했다. 이후 튀렌은 네덜란드의 여러 주를 공략하고 여러 도시를 약탈하면서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진격했다. 이에 다급해진 [[윌리엄 3세|네덜란드 총독 빌럼 3세]]는 아군을 [[홀란트]] 근처로 집결시킨 후 암스테르담 근처의 둑을 무너뜨려 인위적으로 홍수를 일으켰고, 이후 홍수선을 장벽으로 삼아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의 진군은 일시적으로 차단되었다. 1672년 7월 9일, 튀렌은 헬데를란트의 네이메현을 함락시킨 뒤 이틀 후 스헤르토겐보스까지 공략했다. 이리하여 네덜란드를 구성하는 7개 주중 [[위트레흐트]], [[헬데를란트]], [[오버레이설]]의 3개 주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갔고 나머지 4개주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루이 14세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하고 네덜란드에게 평화 조약의 대가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윌리엄 3세|빌럼 3세]]는 프랑스의 강화협상을 거절하고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홍수선을 뚫는데 애를 먹으면서 전황은 지지부진해졌다. 한편,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지원에 나섰다. 여기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에 압박을 느낀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전쟁을 더이상 진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마스트리흐트]]를 제외한 네덜란드 점령지에서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러던 1673년 1월 오스트리아-브란덴부르크 동맹군 25,000명이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장군(1609~1680)의 지휘하에 네덜란드로 진군하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미점령 지역과 라인 강 유역을 점거하고 있던 튀렌은 이들에 맞서 싸웠다. 당시 튀렌에게 주어진 병력은 16,000명으로 적보다 열세였고 루부아 후작 프랑수아 미셸 르 텔리에가 군사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갈등을 빚었다. 다만 루부아 후작이 보급만큼은 충분하게 지원해줬기 때문에, 튀렌은 적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오히려 분견대를 활용하여 북독일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1673년 6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네덜란드와의 동맹에서 이탈하고 전쟁에서 빠진다. 1673년 겨울, 튀렌은 일단 적의 공세를 막긴 했지만 적이 또다시 공세를 가해오면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루부아 후작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루부아 후작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튀렌을 알자스로 이동시켰다. 이에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장군은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하고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라인강 저지선을 돌파하여 빌렘 3세의 네덜란드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11월, 네덜란드-오스트리아 동맹군은 본을 함락시켜 라인강 하류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파괴했다. 튀렌은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알자스 방어에 전념해야 했다. 1674년 6월 튀렌은 오스트리아군이 로렌 공작 샤를 4세에게 가세하는 걸 막기 위해 여름 공세에 착수해 6월 16일 진스하임에서 로렌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로렌군은 하이델베르크에서 알렉상드르 드 부르농빌의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튀렌은 일단 후퇴한 뒤 노이슈타트에서 새로운 병력을 보급받고 다시 네카어 강을 건너 팔츠 선제후령으로 진격했다. 알렉산드르 드 부르농빌은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서둘러 남하해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하여 알자스로 향하를 길을 열었다. 이에 튀렌은 그들을 격퇴하기로 결심하고 10월 4일 엔츠하임으로 진군하던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했다. 전투 자체는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채 물러섰기에 무승부였지만 오스트리아군이 알자스로 진격하는 걸 저지하는 건 성공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674년 겨울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다시 전쟁에 뛰어들어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면서 튀렌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튀렌을 지원하기 위해 낭시에서 병력 5천 명을 모집하여 파견했지만, 튀렌은 이들이 제대로 훈련되어있지 않아 별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 11월에 해산시켰다. 그럼에도 그는 1674년에서 1675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겨울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전쟁은 4~10월까지 진행하고 겨울에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루부아 후작이 보급 체계를 개선하면서 겨울에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튀렌은 알렉상드르 드 부르농빌의 혀를 찌르기 위해 겨울 공세를 개시한 것이다. 튀렌은 부르농빌을 속이기 위해 알자스 북부의 사베른과 아그노 사이에서 겨울 숙영지를 편성한 후 알자스 중부의 프랑스 요새의 수비를 강화시켜 겨울을 보내는 것처럼 위장한 뒤 남서쪽으로 멀리 우회하여 적에게 접근했다. 여기에 루이 2세의 증원병력이 도착하면서 병력 규모가 3만 3천명이 되자, 그는 다시 병력을 여러 분견대로 나눈 뒤 보르주 산맥의 프랑스 점령지를 따라서 은밀하게 이동했다. 이때 튀렌은 개별 분견대에게 각자의 이동 경로만 지시했을 뿐 최종 목적지는 밝히지 않았다. 분견대 중 한 부대라도 적에게 적발될 시 작전 전체가 들통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674년 12월 초 사베른의 숙영지를 출발한 프랑스군은 로렌공국으로 향하여 자르부르, 바카라를 통과한 후 12월 18일 에피날에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부르농빌도 적의 접근을 알게 되었지만 적의 최종 목적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대응책을 어찌 마련해야 할 지를 고민했다. 일부 장성들은 프랑스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사베른과 아그노를 탈취하자고 주장했지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벨포르를 점령할 것을 제안했고 로렌 공작 샤를 4세는 자신의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기를 원했다. 적이 이렇듯 우왕좌왕하는 사이, 튀렌은 분견대를 동쪽으로 파견하여 보르주 산맥의 콜 두 본홈므와 콜 드 라 술뤼슈 산길을 천천히 이동하게 해 적이 더욱 혼란에 빠지게 했다. 그 사이 자신은 에피날의 남동쪽 길을 강행군으로 돌파해 르미르몽에서 흩어진 부대를 모두 합류시켰다. 당시 르미르몽에 있던 샤를 4세는 적이 갑자기 나타나자 기겁하고 그대로 도망쳤다. 하지만 튀렌도 12월 27일 벨포르에 도착한 후 식량 보급을 위해 잠시 진군을 멈췄다. 이후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묄루즈로 가서 적 기병대 5천명과 교전해 격퇴하고 벨포르로 귀환한 튀렌은 1675년 1월 4일 본군을 이끌고 콜마르로 진군했고 1월 5일 투르켐에서 오스트리아-브란덴부르크 동맹군을 대파했다. 부르농빌은 적이 이렇듯 강하게 몰아붙이자 어쩔 수 없이 알자스 점령지를 포기하고 스트라스부르로 후퇴했고, 오스트리아는 부르농빌을 전격 해임하고 고령을 이유로 은퇴했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1675년 봄, 몬테쿠콜리는 재차 알자스로 향하기 위해 독일 남서부의 숲과 산악 지형인 슈바르츠발트를 통과하는 경로를 선택하고 총 3만 2천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적이 라인강 근처에 다다르자, 튀렌도 총 3만 5천명을 이끌고 적의 라인강 도하를 저지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 전령을 보내 오스트리아군이 도시의 다리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는 이를 묵살하고 5월 22일 오스트리아군이 다리를 건너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양측은 라인강 동쪽에서 대치했다. 몬테쿠콜리는 프랑스군 우측면에 군대를 진군한 후 슈바르츠발트를 통과하여 오펜부르크를 점령한 후 프랑스군이 건설한 다리를 위협했다. 하지만 튀렌이 부교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발슈테드 근처에 두게 해 그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이후 양군은 대치만 할 뿐 어느 누구도 전투를 먼저 시작하지 않았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을 때 보급난에 시달린 몬테쿠콜리는 북쪽으로 후퇴하여 렌치강 근처로 후퇴했다. 그러자 튀렌은 즉시 본군을 이끌고 적을 추격했다. 이때 그의 군대 역시 적처럼 보급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적을 섬멸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해 이를 무릅쓰고 강행군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뜻밖의 사고에 직면하고 만다. 1675년 7월 27일, 튀렌은 잘츠바흐에서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을 따라잡고 전투를 개시했다. 이때 그는 포병 진지를 시찰하며 적을 어찌 격파할 지를 궁리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날아온 적 포탄이 튀렌이 있던 진지에 떨어졌고, 튀렌은 이 포탄에 맞아 즉사했다. 향년 만 63세. 이 소식을 들은 몬테쿠콜리는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고 한다. > "존경했던 한 남자가 오늘 죽었다!" 프랑스군은 경애하는 지휘관이 즉사하자 퇴각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몬테쿠콜리의 엄명에 따라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시신은 본국으로 운구하여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후대에도 그에 대한 예우는 여전해서, 프랑스 혁명 때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된 왕족 및 귀족들의 무덤들이 대거 훼손될 때도 튀렌의 유해는 파리 식물원으로 따로 옮겨서 보전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앵발리드로 이장할 것을 명령해서 튀렌의 묘소는 [[앵발리드]]에 있다. [각주] [include(틀:표절, version=18~28, source=한국어 위키백과)] [[분류:1611년 출생]][[분류:1675년 사망]][[분류:아르덴 출신 인물]][[분류:프랑스의 자작]][[분류:프랑스의 군인]][[분류:전쟁 사망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